"우리는 스승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신바람 나는 공동체를 살아가고, 지금 여기 우리의 하느님 체험을 쉬운 말로 풀어낸다."
바로 연구소의 <사명선언문>입니다. 이 사명선언에 따라 성찰은 깊고, 소통은 쉽고 넓게 하기 위해 연구소 식구들이 쓴 칼럼들을 모아 놓은 공간입니다. 때로는 따뜻한 격려로, 때로는 아프지만 약이 되는 비판으로 소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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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정보 2021.06.17.

이 글은 <가톨릭평론> 32호(2021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적군 묘지 앞에서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워 있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들어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 리면 가로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으로 흘러가고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砲聲)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구상 시인의 "초토(焦土)의 시" 8편 '적군 묘지 앞에서'다. 휴전선 근처에 있던 북한군 중국군 묘지를 보고 지은 시로 추정된다. 적군 묘지는 말 그대로 적이었던 군인들의 유해를 묻은 곳이다. 6·25전쟁 직후 전국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96년 7월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55 한곳에 모았다. 사망한 적군이라도 정중히 매장해 분묘를 만들어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우리 정부가 북한군, 중국군 유해를 모두 옮겨 조성했다.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와 정의평화위원회는 매년 11월 첫째 주 금요일 이곳에서 위령미사를 드리고 있다.(2년 전인 2019년에는 우익단체들의 방해로 열리지 못했고, 2020년에는 코로나19를 핑계로 군이 허락하지 않아 못했다)

나는 경기 북부지역에 갈 때마다 이곳에 들린다. 전쟁의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또 당시 스무 살 안팎이었던 앳된 젊은이들의 죽음이 너무 안쓰러워 기도라도 바쳐주기 위해서다.

이 묘역에 묻혀 있는 북한군들은 거의 전부가 무명이다. 전투가 치열해 군번줄을 챙길 새가 없었을 수도, 이쪽에서 수습했으니 굳이 챙길 필요가 없다고 보았을 수도 있다. 나는 처음 이곳에 묻힌 군인들이 모두 북한지역 출신이라고 생각했다. 구상 시인도 이들이 북한지역 출신이라 생각해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 리면 가로막히고”라고 썼을 것이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이들 중 북쪽 출신이 아닌 이도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징용

6·25전쟁 발발 당시 서울 인구는 144만 6000명이었다. 이 가운데 40만 명만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기 전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피난 간 사람들 가운데 80퍼센트가 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20퍼센트가 고위 공무원, 우익 정객, 자유주의자, 그리고 군인과 경찰의 가족이었다.(1945년 이후 북한의 ‘민주개혁’을 피해 월남한 사람들, 북한이 가장 크게 처벌한 대상인 친일 경력자, 군인과 경찰, 남한에서 일정한 지위를 가졌던 지배층이나 우파 지식인들이었다.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개, 2000, 97-98쪽.) 인민군에게 붙잡히면 반동분자로 찍혀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이들이었다. 나머지 100만 명의 시민이 서울에 남았다. 그리고 공무원, 경찰이 빠져나간 자리를 인민군과 새로운 정부조직이 채웠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뀐 것이다.

서울의 주인이 바뀌면서 서울시민은 새 주인의 뜻을 따라야 했다. 이때 가장 먼저 곤경에 처한 이들은 피난을 가려 했으나 가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반동분자’로 몰릴 가능성이 높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자수나 도피를 선택해야 했다. 그다음으로 다급한 이들은 고등학생, 대학생, 30살 미만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자의 반, 타의 반 인민군복을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6·25전쟁 발발과 함께 처음 남쪽으로 내려온 인민군 규모는 25만 명 정도였다. 남한 전체를 장악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숫자였다. 그래서 인민군은 점령지역에 있던 청년들에게 사상교육을 통해 자원입대를 시키거나 다급하면 강제로 징용했다. 이때 상당수가 징용을 피하고자 서울을 몰래 벗어나거나 들키지 않을 만한 곳에 숨어 있었다. 이러한 일은 남한 내 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이렇게 징용된 청년들은 대충 인민군복을 걸치고 무장 상태도 시원찮은 상태로 남진하는 인민군에 합류해야 했다. 아마 이들은 인민군이 남한 전역을 쉽게 점령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전쟁 초기 인민군의 기세가 대단했으니 그리 생각했을 수 있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그들이 달리 피할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국군과 유엔군의 저항이 거셌다. 이로 인해 전투 중 사망하는 젊은이들이 제법 생겼다. 게다가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군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남한 전역에 길게 포진했던 인민군의 허리가 잘렸다. 이 일로 15만 명이 넘는 인민군이 포로가 되었고, 나머지는 북으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남한 주민에게 해코지를 당해 죽은 경우도 있었다. 당시 이들의 퇴각을 경험한 남쪽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패잔병 가운데는 앳된 소년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북으로 퇴각했다가 중국군 남하 시에 같이 내려온 이들 가운데 전사자가 나왔을 수 있고(경기도와 충청도 북부에서),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선이 다시 북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전사한 이들도 있었을것이다. 인민군은 국군 포로들을 인민군에 편입시켜 전쟁을 수행하게 했으니 국군 출신도 있었을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이었기에 적군묘지에 묻힌 이들이 모두 북한 출신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반동분자 학살

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반동분자를 색출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자수 권유도 동시에 진행되었는데 그 대상은 다음과 같았다. ‘도피 분자, 요언(妖言) 전파분자, 밀정, 파괴 분자, 과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권에 적대 되는 행동을 한 자, 무기 탄약을 소지한 자인데 기한 내 등록하지 않거나 납부하지 않은 자’ 등이었다.(연정은, '북한의 남한 점령시기 ‘반동분자’ 인식과 처리', 서중석 외, "전쟁 속의 또 다른 전쟁", 선인, 2014 참조.) 이 가운데 북한을 반대하는 정당, 사회단체에 소속해서 활동한 자, 경찰, 고위 공무원 출신들은 체포 대상이었다. 다시 이 가운데 ‘반동정부기관 복무자, 반동정당 사회단체, 국군 및 반동경찰의 밀정, 미군 정보기관의 밀정, 이북 탐정원’은 처형 대상이었다. 이 바로 아래 단계가 숙청 대상이었다.

인민군은 처음 포용정책을 펴 자수한 이들에게는 관용을 베풀 것이라 선전했다. 자수자는 과거 죄과를 묻지 않고 용서해 줄 것이라 약속했다. 이 선전을 믿고 1950년 7월 13일 현재 1만 103명이 자수했다. 자수자들은 모두 자수청원서를 썼는데, 여기에 과거 행적과 죄과를 모두 밝혀야 했다.(내무장관 출신 김효석의 사례 참조) 이들 자수자들은 약속대로 신체적 위해를 당하진 않았으나 인민군에게 협조를 약속하고 그들 감시하에 지내야 했다.

내무장관 출신 김효석의 사례

<조선인민보> 보도 내용

내무장관으로 있으면서 경찰테러단을 결성하여 수많은 인민을 학살한 김효석이 자수를 하였다. 김효석은 1948.5.10. 선거에서 경남 합천군 국회의원으로 당선 그러나 서울이 해방되자 인민의 원수 김효석은 자기의 죄악을 깨닫고 지난 6월 30일 밤 8시경 종로구 옥인동 인민위원회를 찾아와 천인 공로할 자기 죄과에 대하여 눈물로 회개하면서 인민의 의사로 처벌해 달라고 자수하였다.

김효석이 자수한 후 방송한 내용

저는 역도 이승만을 직접 보조하여 소위 내무장관으로서 금년 봄까지 인민을 학살하는 데 노력하고 그 후에도 반민족적인 길을 걸어온 반역죄인이올시다. 저는 수많은 애국적 동포들을 검거 투옥 학살하고 조국과 민족을 팔아먹기 위한 가지가지 음모에 참가하였습니다.

<조선인민보>(1950.7.5)

자수를 거부하다 체포된 이들은 모진 고문을 당했고, 반동행위 등급에 따라 재산 몰수, 감옥형, 처형 등의 처벌을 받았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처형당했다. 인민군은 이렇게 ‘인민권력’에 저항하는 이들을 ‘반동분자’로 규정하고 이들을 내부의 적으로 간주해 등급에 따라 처벌했다. 지방으로 갈수록 전쟁 전 좌익세력에 직접 폭력을 가한 자, 밀고자, 이를 시행하는 지위, 명령계통에 있었던 이들까지 반동분자로 간주해 고문하거나 처형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처형자가 많지 않았다.

반동분자에 대한 본격적인 학살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퇴각하는 상황에서 벌어졌다. 김일성은 1950년 9월 27일 점령지역에서 일시적인 전략적 후퇴를 명령했다. 이 명령과 함께 인민군에 의해 남한 점령지역 내 시 군 형무소, 내무서 유치장, 정치보위부 유치장에 감금돼 있던 이들이 학살당했다. 자수해 집으로 돌아갔던 이들도 다시 체포되어 학살당했다. 대량학살은 1950년 9월 26일에서 30일 사이에 집중되었다. 인민군에 의해 이뤄진 학살의 84.6퍼센트가 이 시기에 이뤄졌다. 학살이 이뤄진 범위도 전국적으로 광범위했다.

점령 초기 인민재판도 반대세력에겐 큰 공포였다. 실제 인민의 이름으로 반대자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래서 전쟁 초기 피난, 자수, 도피는 ‘반동분자’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위의 책, 304쪽)

부역자 학살

유엔군이 9월 북진해 남한지역이 다시 국군 수중에 들어오자, 이제는 국군과 경찰이 인민군에 부역한 이들을 학살했다.(“부역이란 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행위를 가리킨다.” 이 용어는 인민군의 점령 아래 있던 서울시민의 처리를 논의하는 가운데 처음 제기되었다. 그 이전에는 ‘이적’, ‘역도’, ‘제5열’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반역분자’, ‘공산분자’, ‘가담협력자’라는 용어도 쓰였는데 1950년 10월 들어 일제히 ‘부역자’로 통일되었다. 서중석 외, "전쟁 속의 또 다른 전쟁", 선인, 2014, 130-140쪽 참조.) 이 학살은 1950년 9월부터 시작해 중국군이 참전해 서울지역을 점령하는 1951년 1월까지 넉 달 동안 계속되었다.

당시 합동수사본부 부역처리방침에 따르면 다음에 해당하는 이들은 불문에 부치거나 포섭 대상으로 간주했다. 1) 6·25 전까지 선량한 자로서 자기 생명보호를 위해 부득이 소극적으로 협력한 자. 2) 6·25 전까지 선량한 자로서 소극적으로 공산 측에 추종했으나 군경, 공무원, 민족진영 지도자와 가족 등을 구조한 자. 3) 피동적으로 부역했으나 대한민국에 충성해 협조한 실적이 있는 자. 4) 6·25 전까지 좌익에 가담한 사실이 없는 자 등이었다. 이렇게 경미한 대상을 골라낸 다음에는 한국전쟁 전에 좌익활동을 했던 이들,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이들을 등급에 따라 처벌했다.

미국 자료에서 확인한 부역자 처리 건수는 1950년 11월 8일 현재 1만 7721명이었고, 이들은 군법회의 회부 2192명, 지방법원 이관 7748명, 석방 7588명이었다. 각 시도 경찰국에서 집계한 숫자(9월 28일-11월 13일)는 5만 5909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2만 7641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1950년 12월 30일까지 검거된 부역자 숫자는 15만 3825명, 자수 39만 7090명으로 총 55만 915명이었다.(내무부치안국, "한국경찰사 1948.8-1961.5", 1973, 547쪽.) 이들은 사형, 무기징역, 10년 이상의 징역형, 10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거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때 사형을 당한 부역자의 숫자는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숫자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당시 학살 사건은 해외언론에도 보도되었는데 처음 보도된 사건이 ‘홍제리 처형언덕’이었다.

한국 경찰이 12월 16일 영국 29여단 기지 근처에서 34명의 죄수를 트럭에서 내리게 한 뒤 참호 앞에 무릎이 꿇려진 상태에서 총살했다. 두 명의 여성과 두 명의 아이(8세, 13세)가 포함된 것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많은 영국군, 미군 병사들이 이를 목격했다. 기자들은 이 처형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사건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한 기자는 그들이 34명이 묻힌 장소에서 수백 명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했으며 영국 군인들은 이 사건으로 매우 흥분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사건 다음 날 아침 영국 군인들은 또다시 죄수들을 데리고 나타난 한국 경찰들을 무장해제시켰고 죄수들을 묻으려고 판 참호를 다시 덮으라고 명령했다.(RG 358 Box 1〈NoGunRi File〉 1820-00-00008.)

당시 홍제리에는 영국군 29여단이 주둔했는데, 영국군의 만류에도 경찰은 처형을 계속했다. 이런 사정이 영국 <런던 타임스> 10월 25일 자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경찰과 애국조직은 한국 사법관할 지역에서 보복하고 한국군의 부역자에 대한 보복이 공산주의자가 저지른 잔학행위보다 못할 것이 없다.... 남자와 여자들이 UN의 깃발 아래 공산주의자로 혹은 부역자로 죽거나 투옥되고” 있으며 여성, 아이들에게 잔인하고 부정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부역자로 처벌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여성이 많았다. 이 이유에 대해 이임하 박사는 첫째 피난 갈 때 남성들이 주로 몸을 피하고 여성들은 집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 피난을 가지 않았더라도 남성들이 대개 숨어 있어 노동 동원과 대회 참가는 여성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이임하, '한국전쟁이 부역자 처벌', 서중석 외, "전쟁 속의 또 다른 전쟁", 선인, 2014, 165쪽.) 이 여성들의 죄명은 인민반장, 인민통장, 여성동맹 간부로 일하며 여맹 가입 권고, 양념과 놋그릇 등을 징발해 인민군에게 제공, 주민들 강제 노력 동원, 우익인사 색출 협조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 40살 이상 여성들은 앞의 두 가지 이유로 남편들 대신 부득이 부역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같다. 20살 전후 여성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지식인이거나 사회주의에 동조한 이들이었다고 한다.

‘반동분자’ 처벌은 1950년 9월 말 끝났으나 부역자 처벌은 휴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연좌제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부역 경험자들은 이중의 고통을 두 세대에 걸쳐 당했다. 본인도 물론이거니와 자녀와 친척들에게도 불이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살의 트라우마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어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교 가면 데모하지 마라. 부득이 데모를 하게 되더라도 앞장은 서지 마라. 주동은 절대 안 된다.” 학교에 가 보니 다른 친구들의 부모님도 다 그리 말씀하셨다고 했다. 졸업 후 군대를 가니 고참들이 뺑뺑이를 돌릴 때 너무 잘하지도 그렇다고 처지지도 말라고 했다. 일찍 달려 들어오면 “너만 살려고 그러느냐!”고 면박을 주고, 처지는 이들한테는 “너희 같은 고문관 때문에 인생이 힘들다”고 타박했다. 이 말이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중간’이 늘 다수가 속해 있는 곳이라 ‘보상은 적어도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설사 벌을 받더라도 숫자가 많으면 감해 주거나 무효화되었다. 친일도 부역도 정도가 큰 사람들이 처벌을 당했지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굴종한 다수의 사람은 유야무야 넘어갔다. 전후 일본, 독일, 프랑스가 그랬다. 그래서 일단 그 방향이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중간에 서는 게 중요하다.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아마도 이 서글픈 지혜는 길게는 왕조시대, 짧게는 일제 강점기부터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명분이야 어떻든 나서면 험한 꼴을 당하는 경험을 많이 하다 보니 이런 서글픈 생존의 지혜를 터득한 것이었을 터.

6·25전쟁은 3년 1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이 기간 가운데 학살은 대부분 1950년 7월에서 1951년 1월까지 반년 사이에 일어났다. 6월부터 9월까지는 인민군이, 9월 말부터 1월까지는 국군이 학살을 주도했다. 6·25 직전에는 남북이 각자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반대자들을 학살했다. 6·25 직전에는 남한에서 보도연맹사건으로 20만 명 가까이 학살당한 것을 포함해 남북을 합칠 경우 40만 명 가까이 학살을 당했다. 이유가 있어 죽임을 당하는 것도 억울한데 영문도 모르고 죽은 이들이 적지 않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을까?

이들의 죽음은 그들의 가족은 물론 이를 지켜본 다른 이들에게도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로 인해 남한사회에서 부역이 친일보다 더 나쁘게 인식되었다. 방대한 부역자 규모, 그들과 연결된 연좌제가 이를 더 강화했다. 극우반공체제가 공고하게 유지되고 여전히 영향을 행사하는 것도 이 무의식에 잠재된 공포의 경험 때문이리라.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트라우마 치료가 시급하다.

박문수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운영연구위원,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이사. <가톨릭평론> 편집위원장.
신학과 북한학을 공부했고, 가톨릭 평화론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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