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승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신바람 나는 공동체를 살아가고, 지금 여기 우리의 하느님 체험을 쉬운 말로 풀어낸다."
바로 연구소의 <사명선언문>입니다. 이 사명선언에 따라 성찰은 깊고, 소통은 쉽고 넓게 하기 위해 연구소 식구들이 쓴 칼럼들을 모아 놓은 공간입니다. 때로는 따뜻한 격려로, 때로는 아프지만 약이 되는 비판으로 소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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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정보 35호_[2022년 봄호]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위한 운동

이 글은 <가톨릭평론> 35호(2022년 봄)에 실린 글입니다.

우리는 참 슬프고도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다. 실업이 일상화되고, 부채가 증가하고, 소득은 턱없이 부족하고, 소비에는 많은 제약이 따르며, 취업, 병역, 결혼 등 진로에 대한 부담으로 정신적 피로감 또한 가중되는 ‘5중고’를 겪는 청년들이 그것도 모자라 성별로 나뉘어 서로를 물어뜯게 하는 세상이다.1) 대선 후보로 나선 ‘남자 어른’ 대표 주자들은 노동, 기후 위기, 사회적 안전망 등을 주제로 건설적인 토론을 벌이고 대안을 고민해도 부족할 판에 성별 갈라치기를 하며 갈등과 논란을 부추기고 있다. 모두에게 닥친 위기의 본질은 생존권을 박탈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차별과 불평등과 부정의인데, 왜 이른바 ‘젠더 갈등’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어 버렸으며, 페미니즘이 마치 사회적 적폐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을까. 또 가톨릭교회는 이 논란의 스펙트럼 중 어디쯤에 서 있을까.

출산과 낙태, 피임, 결혼, 이혼, 여성 사제 등 민감한 사안에서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입장과 페미니즘은 분명히 갈등을 일으키며,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이 ‘젠더 갈등’ 국면에서 여성들에게 안전한 공간이 아니다. 더구나 요즘엔 코로나19 팬데믹이 가져온 불안함과 위기에 대한 반응인지 교회의 ‘전통에 근거한 신앙’을 강조하는 목소리들이 부쩍 커졌다. 물론 한 치 앞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신앙 공동체의 본질과 정체성을 고민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문제는 이렇듯 교회의 전통과 정체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들이 대체로 페미니즘을 ‘이데올로기’로 단정하고 교회의 가르침과 함께 갈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불편한 시각은 쌍방향으로 오고 간다. 적지 않은 수의 페미니스트 또한 교회를 여성에게 위험하고 위해한 공간이자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근거지로 본다. 정말 페미니즘은 가톨릭교회와 공존할 수 없으며, 양자택일의 문제가 되어야 하는 걸까? ‘가톨릭 페미니스트’ 혹은 ‘페미니스트 가톨릭’이란 그저 형용 모순에 불과할까?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이어질 글에서는 한국 사회의 여성과 가톨릭교회, 그리고 여성신학을 주제로 오랫동안 나누고 싶었던 생각을 풀어 볼 예정이다. 엉킨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페미니즘과 여성신학에 대한 신자들의 불편함은 한국 사회에 팽배한 반페미니즘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소위 ‘이대남’ 현상이라 불리는, 페미니즘을 ‘남성차별주의’라 간주하는 20대 청년 남성들의 분노부터 살펴보자.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젠더 갈등’과 ‘우리나라 페미니즘’

내 경험에 국한되긴 하지만, 이제 20대 중반이 되는 조카를 비롯해 이제껏 내가 만나본 이른바 ‘이대남’들은 신문에 보도되는 것과는 사뭇 다르게 페미니즘 자체에 대해 격렬한 반감을 품지 않았다. 그들은 남성과 여성이 각기 ‘다른’ 차별을 경험한다고 생각했으며, 젠더 공방에 대해서는 비생산적이고 비현실적이고 피곤해서 끼어들기 싫다고 했다. 물론 반페미니즘 정서는 분명히 존재하고, 반대를 넘어 여성에 대한 증오와 폭력으로 변질된 현상은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하지만,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과격한 목소리가 20대 청년 전반의 젠더 감수성을 대변하는 것 같지는 않다.(이런 의미에서 ‘이대남’ 혹은 ‘이대녀’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갈등에 대한 책임은 돌출되는 목소리들을 부각해 불순한 이득을 얻고자 하는 정치인들과 언론에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 ‘젠더 갈등’ 논쟁에 회의적이더라도, 많은 20대 청년이 성별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있다. 이른바 ‘우리나라 페미니즘’이다. 대체 이 ‘우리나라 페미니즘’이란 무엇을 지칭하는 건지, 이 단어가 내포하는 거부감의 층위와 근원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겠다.

여성들이 처한 현실이 다양하고 복잡한 만큼, 페미니즘도 다양한 사고와 실천의 흐름을 만들어 왔다. ‘우리나라 페미니즘’은 이렇듯 다양한 페미니즘 중에서도 ‘급진주의 페미니즘(radical feminism)’과 ‘자유주의 페미니즘(liberal feminism)’이 지배적인 목소리로 작동하는 페미니즘이다. 우선 논란이 되는 페미니즘에 대한 증오는 표면적으로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듯하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2015년 메갈리아/워마드로 이어지는 페미니즘 운동이 남초 사이트인 일베저장소와 디씨의 몇몇 갤러리에 만연한 여성혐오에 맞서기 위해 미러링 전략2)을 제시하며 적극적인 대응을 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여성학과 여성운동 안에서 크게 부상하기 시작했다.

페미니즘의 다양한 입장 중에서도 급진주의는 특히 남성 혹은 가부장제의 본질에 내재한 폭력성을 여성 억압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남성을 배제한 여성들만의 공동체를 강조하는 분리주의 경향을 띤다. 이 입장에 동조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성폭력 단절을 여성운동이 추구해야 할 목표로 삼으며, 성매매, 포르노그라피뿐 아니라 남성과 성관계, 연애, 결혼 등 모든 일상적 관계 맺음 속에도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남성과 여성의 기본적 관계를 적대적인 것으로 전제하며, 남성을 변화 불가능한 폭력적 집단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분노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은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전형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양산되고 혐오감이 촉발되는 근거가 되었다.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거부감을 표현할 때 흔히 등장하는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한다”라는 발언은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청년 남성들의 거부감과 ‘억울함’을 요약한다.

하지만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 하나만으로는 반페미니즘 정서가 한국 사회에 어떻게 일상화되었는지, ‘우리나라 페미니즘’이 왜 분열의 이데올로기로 인식되는지 설명할 수 없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공적, 정치적 영역에서 실질적인 대안을 마련하기보다 상징적 차원에서 일상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데 집중하므로, 불편할지언정 피부에 닿는 위협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즉 대중이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핑계를 제공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 사회의 반페미니즘처럼 조직화된 흐름을 만들어내기에는 실질적인 효과가 약하다는 말이다. 이 흐름을 작동하게 하는 것은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불안과 위기감이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 및 기회의 평등이라는 초창기 페미니즘의 주류 사상으로, 기존의 사회구조를 바꾸지 않고 여성들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기본적인 목표를 갖고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또 다른 거부감 표현인 “역차별”, “여자도 군대 가라”, “페미니스트들은 입으로는 가부장제를 반대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가부장제에서 여성에게 유리한 것만 취득하고 의무와 책임을 지려 하지 않으려 한다”는 등의 발언은 바로 이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담고 있다.

20대 청년 남성들은 능력주의적 측면에서 기회의 평등을 주장하는 ‘공정’ 이데올로기에 가장 공감하는 세대다. 이들은 여성들 못지않게 자신도 차별의 희생자라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었던 권리와 기회를 여성들이 ‘공정치 못한 방식’으로 갈취한다고 느끼기에 이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다.3) 권리를 박탈당하고 공정한 경쟁에 나서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불안과 분노, 이것이 ‘우리나라 페미니즘’이라는 명칭에 존재하는 거부감의 핵심이며, 우리 사회 이른바 ‘젠더 갈등’의 뇌관인 듯하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젠더 갈등’은 사실 표면으로 떠오른 현상에 불과하며, 그 실체는 소수의 승자만이 기회와 권리를 독점하는 신자유주의 질서 내의 차별과 불평등에 있다. 노동과 일상에 촘촘하게 파고들어 남녀격차뿐만 아니라, 남―남, 여―여 격차 또한 확대하는, 내가 살아남으려면 한 사람이라도 더 따돌려야 한다고 믿게 하는 그 이데올로기 말이다. 성차별은 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가장 공고화되는 억압 기제 중 하나다.4)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우리나라 페미니즘’이 문제라면?

겉으로 드러난 ‘우리나라 페미니즘’과 ‘반페미니즘’은 적대적인 듯 보이지만 공통분모가 있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이 둘은 여성으로서 겪는 보편적 차별(성폭력과 유리천장)에 집중해 ‘모든 남성 대 모든 여성’의 구도 속에서 성차별을 인식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결정론적 시각의 문제점은 성차별이 사회의 다른 차별과 억압의 기제와 연동하는 현실을 가리고, 특히 신자유주의 아래 평등한 기회와 공정성이라는 구호가 갖는 한계와 허상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도 ‘모든 남성’과 ‘모든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이론에서나 존재할 뿐, 현실에는 없다. 여성 개개인은 (물론 남성 개개인도) 누구나 교육, 경제, 출신, 인종, 문화, 이성애 중심주의, 건강 불평등 등으로 발생한 다수의 구조적 차별 이데올로기들이 종횡으로 교차하는 지점에 살고 있으며, 이 교차점에서 서로 다른 종류와 무게의 억압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이렇듯 전 방위적으로 삶을 억누르는 다양한 차별과 억압의 기제가 모두 제거된 상황에 존재하는 순수하고도 독립적인 가부장제의 모순은 이론 밖에서는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이런 가정 속에서 추구되는 여성의 권리는 ‘모든 여성’이 아닌, 극히 일부의 여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이렇게 주어지는 권리와 평등은 오히려 중층의 억압을 경험하는 대부분 여성이 겪는 차별을 심화하는 동시에 소수의 특권층 여성이 이룬 성공을 마치 여성 전반의 권리가 신장된 것처럼 왜곡해 남녀 갈등을 부추긴다.

‘우리나라 페미니즘’이 이런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다면, 그럼 ‘우리나라 페미니즘’을 폐기하고 ‘다른 페미니즘’을 선택해 추구하면 될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자유주의 페미니즘만을 페미니즘의 전부로 표현하거나 인식하는 것은 분명한 문제점이다. 청년 남성들이 또래 여성들이 성차별을 경험하는 것을 직접 보지 못했다고 해서 없는 것으로 치부하거나, 직접적인 혐오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술자리와 단톡방에서, 온라인 뉴스 답글을 통해 아무렇지도 않게 여성을 대상화하고 외모를 품평하는 행위를 성차별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점은 분명히 페미니즘의 다양한 시각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결과이니, 이들이 ‘다른 페미니즘’을 접하며 시야를 확대하고 편견을 제거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교육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페미니즘 내의 다양한 입장은 취사선택을 하여 필요한 것만 골라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입장이 담보하는 고유한 경험을 존중하고 때로 실패와 오류가 따른다고 해도 대화를 통해 조율하고 함께 진화하고 성장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다. 급진주의와 자유주의가 때로 과격한 모습을 보이고 또 한계를 갖는다고 해도, 이 두 입장은 가부장제, 즉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의 사회구조를 다른 사회적 구조에 종속시켜 다루지 않고 그 자체로 단일하고 고유한 역사를 가지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점, 여성들이 경험하는 차별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취약한 부분을 드러내고 저항한다는 점에서 폐기처분될 수 없는 고유한 역할이 있다.

‘우리나라 페미니즘’보다 더 큰 문제는 페미니즘을 수치적 평등을 위한 것으로, 남성과 여성으로 편을 갈라 이기고 지는 싸움으로 보는 시각이다. 페미니즘은 많은 이가 오해하는 것처럼 단순히 여성의 권리를 남성의 것과 양적으로 동등하게 만들거나, 남성 중심의 사회를 전복하려는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입장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삶의 기본적 조건, 즉 인간이 태어나 죽기까지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다른 이들과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삶의 양식을 성별과 성 정체성에 치우침 없이 만들고자 하는 운동이다. 여성을 위한 운동이라기보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위한 운동이며, 여성과 남성 모두 온전한 노동과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다.

 

가톨릭교회와 페미니즘

페미니즘을 단순히 여성의 권리를 위한 이념으로 보는 시각은 교회 내에도 존재한다. 여성 사제 서품 논의를 비롯해 교회에서 여성의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흔히 접하게 되는 반응은 “여성에게는 여성의 역할과 자리가 있고, 하느님은 모든 것을 귀하게 여기신다”이다. 프란치스코 교종 또한, 2013년 7월 22일 세계청년대회를 마친 뒤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성모 마리아가 사도들보다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오늘날 교회의 여성들도 주교나 신부보다 중요한 존재다”라고 말했다.5) 그가 아직 아르헨티나의 추기경이던 시절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라틴아메리카 랍비신학교 학장이며 랍비인 아브라함 스코르카와 여성사제직을 주제로 한 대담을 통해 페미니즘에 대한 불편함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교종은 “가톨릭교회에서 여성이 성직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여성이 남성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페미니즘은 그것을 옹호하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어떤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것이 오히려 여성들을 보복적인 투쟁의 장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라고 했다.6) 교종의 발언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다음 호에서 더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다.

 

1) 현대경제연구원, '청년층 경제 활동 제약의 5대 특징과 시사점', 안선희, '다섯 가지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는 한국 청년들', <한겨레>, 2018.2.18.(최종 접속일, 2022.2.12.)

2) 미러링은 상대방의 폭력적인 언어와 행위, 특히 여성혐오적인 언어나 행동을 반대로 뒤집어 보여줌으로써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페미니스트 전략이다.

3) 김경희 중앙대학교 교수와 마경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의 '새로운 세대의 의식과 태도: 2030세대 젠더 및 사회의식 조사 결과'(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전국청년정책네트 워크, 2019)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라고 여기는 남성이 19-24살 80.7퍼센트, 25-29살 75.4퍼센트로 다른 세대 남성보다 더 많았으며, ‘정당한 요구’라고 생각하는 남성은 19-24살 24.1퍼센트, 25-29살 32.8퍼센트로 20대가 가장 적었다. 또한 ‘여성차별이 심각하다’는 의견은 19-24살 여성이 90.8퍼센트, 25-29살 여성이 86.2퍼센트인 반면, 19-24살 남성은 33.8퍼센트, 24-29살 남성은 47퍼센트에 불과했다. 반면 ‘남성차별이 심각하다’는 19-24살 남성은 67.6퍼센트, 25-29살 남성은 65.3퍼센트였다. 같은 생각을 하는 19-24살 여성은 38.2퍼센트, 25-29살 여성은 60퍼센트였다. 조혜정, '‘이대남’을 화나게 한 ‘그 페미니즘’',  <한겨레>, 2021.12.25.(최종 접속일, 2022.2.14.)

4) ‘젠더갈등’이 아니라 성차별을 문제의 핵심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여성학자 정희 진의 칼럼 '‘젠더갈등’이 아니라 성차별이다', <경향신문>, 2021.11.24. 참고.(최종 접속일, 2022.2.13.)

5) 한상봉, '여성사제, 여전히 남은 숙제', <가톨릭일꾼>, 2018.12.3.(최종 접속일, 2022.2.14.) 참고.

6) 교황 프란치스코·아브라함 스코르카, 강신규 옮김, "교황 프란치스코의 천국과 지상", 율리시스, 2014, 148-154쪽 참고.

 

조민아

신학자.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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